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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영 학생(본교 M.Div., 수필가)

 

힌두 사원 방문에 마음이 앞선다. 그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보고 싶어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햇살이 힌두 사원 위로 비추어 내릴 때, 그곳에 내 몸을 세워보는 거다. 관찰은 현장에서 해야 제맛 아닌가. 언제나 그렇듯 여행은 늘 설렌다. 하물며 그 앞마당조차 지나치지 않은 힌두 사원이니 심장이 고요할 수 없다. 문도 열기 전 도착,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나와 사뭇 다르게 생긴 안내인이 다가와 내 정체를 묻는다. 나는 이방인처럼 크리스천이라고 서먹서먹 대답한다. 그는 초록 핏줄 오른손으로 튀어나온 배를 다독거리고 실장갑 왼손으로 콧수염을 매만지며 제 갈 길을 간다. 일단 이곳을 관람하고 나면 누구라도 힌두교인이 될 거라 자부하는 그런 태도다. 저런 근자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햇살은 여전히 따스하고 포근하며 사랑으로 내려쬔다. 사랑의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한 그대로다. 브라흐마가 창조하고 비슈누가 유지한다면 햇살은 다분히 ‘힌두적’이리라. 무엇이 힌두적인가. 그들 방식대로 ‘햇살 신’이라 이름 붙이면 되는 일인가. 이래서는 인간에게 경외심이 생길 리 없다. 종교라는 말도 사치고 그냥 ‘힌두적’이라 하든가 ‘힌두 철학’ 정도면 족하다. 잡념이 늘어난다. 정신 추스리고 사원 안으로 발을 옮긴다. 어차피 하나님의 햇살은 계속 내려쬘 테니.

 

눈앞에 나타나는 수많은 조각들로 관찰은 무용지물이 된다. 뭐든 과하면 정의고 뭐고 없는 법이다. 데라가 아브람의 손을 잡고 갈데아 우르를 떠나올 때, 그곳에 있던 조그만 우상들을 죄다 모아 이곳에 전시한다는 느낌이다. 갈데아에서 우상을 섬기며 (수24:2) 살던 데라도 이만큼의 우상을 본 적은 없을 게다. 하나님께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보내면서까지 데라와 아브람을 이동케 한 이유가 무언가. 내 앞의 무수한 우상들을 하나씩 허무느니 어찌보면 휘익 떠나버리는 게 속편하고 빠른 길이리라.

 

저들의 속내가 궁금하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조각을 해댔을까. 애굽의 피라밋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지만 하나 하나의 디테일을 보면 숨이 턱 막힌다. 여기에 믿음이 있는가. 무슨 맘으로 정과 끌로 쪼아대고 파내었을까. 전생의 카르마 때문에 운명적으로 그 짓거리를 해야 하고 내세의 쌈싸라를 위해 죽도록 노동해야 하는 그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다시  태어나려고. 이건 아니지 싶다. 종교란 ‘그렇게 믿음’으로써 시작하고 ‘그러니 믿음’밖에 없어야 할진대, 정작 믿음을 고백할 시간에 파내고 깎아내 만드는 저런 일에, 우상 제작에 평생을 소모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어낸 고귀한 이유는 무언가. 똑같은 햇살을 받으며 살아왔음에도 저들은 왜 하나님의 흔적을 모르고 있을까.

 

말만 통하면 저들에게 내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헬라어로 다 통하던 로마제국시대의 바울이 되어 이곳으로 달려와 내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진솔하게 해주고 싶다. 저들이 힌두교의 복잡한 제의 제례를 들먹이면 나는 레위기를 꺼내겠다. 저쪽에서 Trimurti를 논하면 나도 Trinity로 답하겠다. 창조를 했다고는 하나 정작 이름뿐인 브라흐마를 언급하면 나는 기필코 창조주 하나님을 내세우겠다. 저들의 비슈누가 열 번째 화신으로 내려와 세상 종말을 고한다면 나는 요한계시록을 펴들고 심판과 구원을 알리겠다. 이방 종교에 선심성 관용의 태도로 나온다면 이참에 나도 종교의 공유성으로 친분을 쌓겠다. 저들과의 공유성을 인정해 슬쩍 선교의 다리를 건설하고픈 심산이다. 다리를 놓아 저쪽으로 건너가야 하지 않겠는가.

 

산지사방 조각 작품이 가득하다. 조각은 인정한다. 화려하고 훌륭하다. 우상 치고는 아까운 예술품이라 왠지 허전하다. 창조주라는 브라흐마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갈구하는 그들에게 믿음이란 말은 허용하고 싶지 않다. 인간의 마음속 그 궁극의 것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순례의 길 구도의 길이어야 한다. 고난이 있을 테지만 그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구원의 집은 그 끝에 있다. 힌두 사원을 덮고 있는 저 포근한 햇살이 하나님 사랑의 궁극적 표시임을 조각도를 쥐어본 적 없는 힌두 어린이도 알 거라 생각하며 마당을 떠난다.

 

조로아스터 사원으로 이동하는 길은 막히고 구글마저 주소를 혼동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에서 옛 생각에 빠져든다. 젊은 시절 페르시아에 매료되어 심취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루려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린 사건( 대하36:22 스1:1 )은 성경이 아닌 Cyrus Cylinder를 통해 먼저 알게 된 기억이 있다. 적어도 페르시아는 이스라엘에게 적이 아니요 예수님 탄생하실 즈음, 동방 박사들 손에 선물까지 쥐어보내준 우방이라는 생각에 맘놓고 빠져든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저런 잡념으로 이번에도 내 몸은 벌써 허스름한 조로아스터 마당에 와 있다.

 

신전인가 무허가건물인가. 초라하기 짝이없다. 신전이라 함은 힌두교에나 어울릴 듯하다. 낡은 건물이지만 창조주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로 정성스레 뜨겁게 뫼시겠다는 것인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인 양 이들도 더 화려한 성전 짓기는 않겠다는 생각인지. 가톨릭의 화사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얼토당토아니한, 일체 장식을 절제하는 기독 교회에 가깝다 생각하며 한참을 밖에서 머뭇거린다. 입구 위에 걸린 조형물의 날개 문양은 이사야가 본 환상과 일치한다는 관념이 스치면서 그나마 성경적으로 봐주고 싶다. 

 

건물 내부도 휑하기 그지없다. 돈이 없어서라는 우스개 생각조차 든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기본 교리로 한다니 언제 돈을 벌겠는가. 돈이란 그저 악독한 마음이 조금은 있어야 할 테다. 좋은 생각 말 행동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 지켜야 하는 일반규범일진대 이를 교리로 채택함은 당시 사회가 그렇지 아니함을 방증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사랑도 좋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하니 이 점에서 상통한다. 그렇게 좋은 생각 말 행동을 교리로 삼는 이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은 헤아리지 못하는 걸까.

 

말만 통하면 이들에게 진정한 창조와 새 하늘과 새 땅을 설명해주고 싶다. 이들이 지어낸 창조를 비교분석으로, 이들이 받은 박해를 피차일반으로, 이들의 생각과 말을 겸손모드로 이해접근하는 거다. 동정녀, Magi의 방문, 아기를 살해하려는 통치자, 30세에 시작한 선지자적 활동, 광야에서 악마 아리만의 부하에게 시험받는 일,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은 일, 진리이신 하나님 복음을 전파한 일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행적과 일치함을 거들먹거리며 바싹 다가가 보는 거다. 물론 우리쪽 이야기를 가져다 썼다는 말을 하면 이들이 불쾌해 할 테니 그런 부분은 신중히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도 무방하다. 선교는 접근으로 시작하는 일이요 친밀한 접근은 선교의 핵심이다. 살짝 열린 문 안쪽으로 한 발만 넣을 수 있으면 보험계약은 이미 성사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후라 마즈다와 불 타는 화로를 모신 본전으로 들어간다. 형제들은 흰색 빵떡 모자를, 자매들은 가톨릭처럼 하얀 두건을 머리에 덮는다. 가톨릭을 떠난 나로서는 감회가 새롭다. 하얀 두건의  여성 안내자 모습은 흡사 테레사 수녀를 연상케 한다. 순결 혹은 구별, 헌신 또는 봉사, 그리고 절대자에 대한 믿음은 결코 다르지 않다. 종교 형태가 시간을 건너오고 공간을 달리하면서 외형이 변하고 절차가 다를지언정 궁극은 이토록 일치하고야 마는가. 어찌 보면 모든 고결한 종교는 결국 하나라는 생각도 든다. 하나님의 햇살을 같이 머금고 나누었으니 본질이 다르겠는가. 화로는 생각만큼 크지 않고 그저 의미 부여로 설치한 정도다. 주변을 사로잡을,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겠지 생각하며 온 터라 실망이 크다. 초라한 화로를 보노라면 본국 이란에 잔존하는 몇몇 배화교인들이 애잔할 뿐이다.  

 

볼 게 없으니 머무는 시간도 짧다. 여행은 그렇다. 아브람의 배다른 자손을 보러 떠난다. 조로아스터 사원에서 이슬람 사원까지는 근거리다. 마치 이란에서 아라비아까지의 거리도 그리 먼 데가 아닌 것처럼. 고국에 있을 때 보았던 한남동 이슬람 사원, 그 건축물을 기억하며 사원 마당으로 들어선다. 이슬람 하면 뭐니뭐니 해도 알라딘 신밧드 동화에 나오는 뾰족한 돔을 구경해야 한다. 여행에서 거창한 기대는 언제나 금물. 설명에 의하면 원래부터 이슬람 사원으로 지은 게 아니고 기존 기독교 건축물을 개조한 거란다. 건축물에 대한 환상은 버리기로 한다. 

 

‘이맘’이라 부르는 유대 랍비 같은 양반이 나서서 간단히 나래이션하는 친절을 베푼다. 기독교인들이 대거 방문할 거라는 사전 예약을 포착했으니 그들도 나름 영접대책을 세웠으리라. 온화하고 관대하게 끌어들려 우리를 포교하려는 속셈을 품었을까. 따지고 보면 우리네 교회가 이방 종교에 대해 텃새부리고 그들의 방문을 외려 불편하게 생각해 온 것과 확연히 다르다. 우리 기독교는 죽도록 선교 나가면서 정작 우리에게 찾아오는 손님에겐 왜 그토록 매몰차게 하는지. 우리는 선교를 무조건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로 찾아오는 모든 이방 사람들을 다 받아들일지어다. 

 

뭐라뭐라 쓰여 있는 천장 스테인드 글라스에 반해 한동안 목을 꺾고 올려본다. 온갖 좋은 수식어로 알라를 치장한다. 그러면 뭐하는가. ‘사랑의 알라’는 없지 않은가. 정작 일치해야 할 최후의 궁극이 다르다는 점에서 의외다. 사랑이 그리 어려운 말도 아니고 신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는 게 사랑이다. 그들의 수식어에서 사랑은 우리와 다른가. ‘사랑의 하나님’보다 우선적으로 할 말이 있는가. 그들은 무지막지 나열한 저 수식어들을 하나로 묶을 사랑의 하나님을 왜 모르는 걸까.

 

말만 통하면 ‘사랑의 알라’가 없는 이유를 묻고 싶다. 우리처럼 아버지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니 홍길동 후예라도 되는가. 어쩌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지 한탄하며 정을 나누고 싶다. 그 정을 토대로 그들에게 오리지날 하나님 이야기를 꺼내면 인지상정 들어주지 않겠는가. 종교를 떠나 사람 간에는 일단 정을 나누고 볼 일이다. 이 또한 선교의 궁극일 테다. 정이 없어 싸우고 정이 없어 갈라서지 않는가. 그러기를 수천 년 이어오고 있다. 이슬람 그들처럼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자. 한 손엔 정으로 다른 한 손엔 말씀으로 무장하자. 우리네처럼 ‘어떻게 왔냐’ 하지 말고 그네들처럼 ‘어서 오세요’ 하자. 선교의 시작은 정부터 나누고 할 일이다. 

 

학우들이 모두 떠나 나만 덩그러니 남는다. 이슬람식 기도를 보고 싶다. 관전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 목 좋은 기둥이 눈에 띄어 그 앞에 자리를 튼다. 그들이 무릎 꿇을 때 나도 따라한다. 다시 일어나고 앉기를 반복하나 나는 그냥 앉아서 그들 뒷모습을 바라본다. 단순 반복이다. 정해진 기도 시간에 앞서 마이크로 뭔가 읊는 듯 15분간 예비절차가 있는데, 마치 교회 본당에 성도들이 가득 찰 때까지 찬양팀이 인도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빈 자리를 만들지 않는다. 중앙에서부터 양 끝까지 오는 순서대로 자리를 채운다. 첫 줄이 완성되면 다음 줄 중앙부터 다시 공간을 채워나간다. 그들의 질서는 아름답다. 우리와 다르지만 엄숙하다. 허리 무릎에 무리가 있는 분을 위해 양쪽 끝은 의자를 배치한다. 작지만 큰 배려다. 여성 성도들은 뒤쪽 귀퉁이에 모여 예배하는데 이게 눈엣가시다. 종교적으로 추구하는 궁극은 일치하면서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이다지 모순이다. 철저히 인간인 탓이다.

 

랍비 같은 안내자 ‘이맘’이 앞에서 잠시 멘트할 뿐, 설교나 찬양이나 헌금형식이 없다. 아주 짧은 예식이다. 하루 다섯 번 하려면 그럴 만도 하다. 마치고 나오면서 헌금에 대해 물으니 종교세라는 걸 언급한다. 별 걸 다 세금으로 낸다는 생각이다. 하여튼 이슬람은 우리와 같으면서 다르다. 구약은 공유(60%)하면서 신약은 마지못해(6%) 차용한다. 그리스도를 유대인처럼 선지자로만 인지한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요1:27)’ 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무하마드 이전에 오신 세례 요한으로 묘사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요1:5) 이유다. 힌두교와 달리 우리처럼 우상은 거부하면서, 우리와는 달리 힌두교처럼 여성은 차별한다. 말로는 아니라 하지만 분명히 여성을 차별하는 관례가 남아있다. 평등하지 않다. 글자 모양만 봐도 써 나아가는 방향부터 서로 다른데 하물며 절대 사상과 종교의 일치가 어디 쉬운가. 회당을 나서는 뒤끝이 묵직하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선교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만 하다 만다.

 

[기사출처: 크리스천 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