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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I. 일상의 삶을 하나씩 지워가면 무엇이 남을까?

중세 신 중심 시대를 지나 등장한 것은 근대 인간 중심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로 들어서면서 인간 이성을 중시한 나머지 역사는 진보한다고 확신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 양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낙관론적 사고에 급제동이 걸리게 되었지요. 이런 역사 인식에 반대할 이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 대전도 사실 지금의 코로나 19사태에 비해서는 전 지구적 이슈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코로나 19는 어느 곳도 예외 없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예측할 수 없는 미증유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미래(未來)”의 글자 뜻은 “아직 오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뜻 자체는 우리가 보통 이 단어를 사용할 때 갖는 어떤 희망과 설렘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김빠진 콜라를 마실 때처럼 밍밍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그 시간에 대해 미리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면 더 그러하며, 모르는데 전망해야 하니 사실 난감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코로나 19의 시대를 살면서 지금 상황도 설명할 수 없는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모습이 어떨까를 이야기하는 것은 ‘눈 감고 어두운 산길을 가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무모한 듯도 합니다.

지금처럼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적이 있었을까요? 미래학자들이나 트랜드 분석가들의 진단을 들어봐도 불투명합니다. 다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기보다는 그동안 해 오던 무엇인가를 줄이거나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지 않고, 식당에 가지 않고, 큰 쇼핑몰에 가지 않고, 미용실에 가지 않고, 영화관에 가지 않고, gym에 가지 않고, 여행을 가지 않고, 서점에 가지 않고, 등등 수많은 곳에 가지 않고 수많은 것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언컨텍트(Uncontact) 사회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진단을 부정할 분은 없을 겁니다. 역사적 좌우 이념을 떠나, 신앙의 진보 보수 이념을 떠나, 눈앞에 드러난 팩트는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인기 강사 김미경이, 자신이 운영하는 김미경 TV 유튜브에서, 컨설턴트 전문가인 김용섭씨가 쓴 『언컨택트』라는 책을 소개하더군요.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을 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과 접촉하던 것을 하나씩 하나씩 줄여가면 무엇이 남을까요? 또 그런 와중에 우리는 무엇 하고 있는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언컨택트 시대에도 기존에 해 오던 것을 여전히 하고 있지 않은가요?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공부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교회에 가지 않는다고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며, 식당에 가지 않는다고 밥 먹지 않는 것은 아니며, 쇼핑몰에 가지 않는다고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미용실에 가지 않는다고 이발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영화관에 가지 않는다고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며, gym에 가지 않는다고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여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서점에 가지 않는다고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동안 해 오던 대면과 접촉의 방식 아닌 것으로 그 모든 일을 하고 있지요. 형식은 바뀌어도 내용은 놓치지 않고 있으니 바뀌어 가는 형식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가요? 코로나 19 이후 교회의 미래 또한 아직 오지 않은 교회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 미래의 교회 모습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교회의 미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여기서 만들어 가는 것이지 싶습니다. 미래는 늘 미래에 있습니다. 그 미래의 교회 모습을 우리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본다 해도 교회의 미래는 여전히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만들어 가는 교회가 내일의 교회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다시금 질문합니다. 포스트 코로나 19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중앙일보 보도(2020년 6월 7일)에 따르면, 개신교는 흔히 “6만 교회, 15만 성직자, 1000만 성도'”라 합니다. 그런데 이들 6만 개 교회 중 80% 가량이 10-20명 정도의 교인이 있는 미자립 소형 교회라 합니다. 평소에도 월세 내기가 힘든데 온라인 예배로 모이지 않으니 더 어렵게 된 것이지요. 대형 교회도 물론 상당한 헌금이 줄었으니 힘든 것은 마찬가지 일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 해야 하나요?

교회를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구분 정의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인해 이러한 정의를 약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모였기에 “모였었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흩어졌으니 “흩어진 교회”라 할 수 있고요. 그리고 현재는 몇몇 교회들은 조금씩 모이고 있다는 점에서 “모이는 교회”로, 그리고 앞으로 완전히 모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모여야 할 교회”로 이름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였던 교회는 과거 완료형이고, 흩어진 교회는 과거형이고, 모이는 교회는 현재형이며, 모여야 할 교회는 미래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현재 흩어진 교회와 모이는 교회 그 어디 즈음에 있겠지요. 그러면 우리의 고민과 질문은 자연히 ‘어떻게 흩어진 교회에서 모여야 할 교회로 옮겨갈 수 있을까’일 겁니다. 아니면 그냥 흩어진 채로 있는 것이 좋은지요, 모여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건지요?

다시금 모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습이 과거 교회 모습을 완전히 회복할 것이라고 보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겁니다. 상당히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모였던 교회”와 “모여야 할 교회”는 결코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그사이에 교회가 흩어져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을 무시한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금 모일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아픔을 경험했기에 결코 같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모여야 할 교회의 모습은 어떨까요? 한국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II. 코로나 19와 한국 교회 과제

1. 교회와 세상

교회의 과제를 제시하려면 교회로 바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놓여 있는 세상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공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코로나 19도 세상 전체에 퍼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신학이 공공의 영역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적 신학은 여기서 가능할 것이며 그 내용도 다층적어야 합니다.

공적 공간에서 신학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신앙과 역사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말씀을 잘 압니다. 다른 말씀은 암송 못 해도 이 말씀만큼은 암송하지요.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인가요? 단순히 과학을 배척하기 위한 수준으로 이 말씀을 사용하나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를 착취할 수 없고, 어느 인종도 어느 인종을 차별할 수 없으며, 만인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그 어떤 이단보다도 더한 이단들이지요. 이렇게 좀 거칠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본래적 의미를 놓치고, 그동안 화석화된 교리를 지키기 위해 이 놀라운 기독교의 고백을 간과하는 것을 그냥 묵인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창조신앙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 창조신앙이 제대로 정립이 되면 역사의식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지요.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섭리해 가시는 역사이기에 그렇습니다. 역사의식을 지닌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인식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거짓 뉴스는 일단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팩트체크도 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팩트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는 바를 바꾸지 않는 것은 자신이 지키는 이념에 따라 자신이 바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 위에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철학자 포이에르바흐가 말하는 “자기의식의 반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는 “제자”는 “역사를 만드는 자”라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인데 역사에는 관심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이 어찌 참된 제자이겠습니까? 교회가 역사와 세상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교회도 정비하고, 세상에 바른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스스로 세상과 만나기 위해 다양한 컨텐츠를 계발해야 합니다. 거룩의 언어는 세상 언어가 없는 곳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 언어 속에서 거룩의 언어를 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과 만나야 합니다. 만나는 방식도 다양해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 후,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자신들의 마음만을 정결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느12:30)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몸을 정결하게 하며 성문과 성벽도 정결하게 한 것을 보면, 우리가 정결하게 가꾸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몸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농담 한 번 하죠. 그동안 “속”이 썩었습니다. “성(sacred)”이 “속(secular)”을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인해 “성”이 “성”을 떠나 “속”으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성과 속을 이분법적으로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 나라와 이 땅, 교회와 교회 밖, 주일과 평일을 이분법적 도식으로 나눈 것이 사실이죠. 그리고 하나님 나라, 교회, 주일을 성스럽게 여기고, 이 땅과 교회 밖과 평일을 속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인해 이러한 성과 속의 분리선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가 어쩌면 우리에게 “속”에서 “성”으로 살 것을 강제적으로 요구하며,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돌봐야 할 교회

영화 <내부자들>에서 지방 출신의 검사가 어떤 이유로 정직됩니다. 살려 달라고 부장 검사에게 호소할 때, 부장 검사가 그에게 농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지 그랬어. 아니면 잘 좀 태어나든가.” 농담이지만 그 말에는 우리 사회가 묵인하고 있는 진실 하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고대 노예제나 중세 봉건제 같은 신분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의 태생을 고려해야 한다면, 그건 비참한 사회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하이웨이에서 나와 신호를 기다리는데 홈리스 한 분이 모자를 벗고는 갑자기 도로로 뛰어듭니다. 가만히 보니 누군가가 창문을 열고 건네주는 돈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그 돈이 너무나도 반가웠고 갈급했기에, 창문 열고 돈을 내미는 손짓에 모자를 벗고 눈동자를 크게 하고는 뛰어간 것입니다. 짐작하건대 그의 눈은 언제나 사람을 향해 있을 것이며 그중에서 돈 주는 이들을 찾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돈은 가진 자에게서 가지지 못한 자에게로 흐르고, 돈을 갈망하는 시선은 그 돈을 받는 자에게서 주는 자에게로 흐르지 싶습니다. 돈을 매개로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가난의 문제가 있는 한 늘 언제나 돈을 갈망하는 홈리스의 처연한 시선은 멈추지 않겠죠.

언컨텍트 시대에 가난의 문제는 더욱더 심해질 것 같습니다. 당장 어머 어마한 수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니 가난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을 기울여야 합니다. 칼 폴라니 연구소의 홍기빈 소장이 프로그램에 나와서 코로나 이후를 언급하며 몇 가지 삶의 원칙을 제시하더군요. 첫째, 사회적 방역 시스템을 구축하자고 합니다. 개인 차원의 건강 관리가 아니라 사회적 건강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둘째는 경제활동 조직인데 시장 경제는 아니라고 합니다. 국가가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여기에 용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셋째, ‘무한한 욕망을 무한히 긍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삶에 자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홍 소장은 “business as usual”(원래 대로의 일상?)로 돌아갈 수 없으니 우리의 삶의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도 사회도 자연도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세 원칙 중 두 번째인 국가가 고용을 보장하자는 주장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요한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코로나 19 이후 전 세계적으로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정 금액의 재정을 지원하는 것도 아마 그런 방책 중 하나일 거라 여겨집니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생을 고려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듯, 개인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그냥 두는 것도 무자비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가난의 문제가 더욱더 심각해질 코로나 19 이후 개인이 할 일이 있고, 사회가 할 일이 있을 테지만 교회가 할 일이 많을 겁니다. 누구보다 가난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교회 아니겠습니까?

3. 교회 과제 1: 교회에 대한 재조명(건물 신학 아닌 공유 신학)

코로나 19 이전에는 교회/성전/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러나 코로나 19 이후 교회에 가지 못하니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와 성전과 예배당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여기서는 구분 없이 사용하고자 합니다). 물론 그중에는 ‘교회는 건물이다, 아니다, 교회는 우리 자신이다’라는 다소 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소모적 논쟁도 있었고요. 신학자 한스 큉은 교회를 “객관적 실체’로 보는 것은 “실체론적인 그릇된 교회관”이라 하여, “인간 없이 교회란 없다”고 했지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에 보이는 교회를 외면할 수도 없지요. 그러니 두 가지 측면 모두를 동시에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도 교회의 가시적 형태와 비가시적 형태를 설명합니다. “교회는 예배하고 서로를 위해 활동하는 공동체로서 가시적이다. 교회는 종말론적 실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비가시적이다.” 가시적 교회를 건물로 보고, 비가시적 교회를,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고전3:16)이라 했으니, 우리 자신으로 본다면, 교회든 성전이든 예배당이든 용어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그렇게 의미가 없다 여겨집니다. 다만 그 의미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예배에 대한 재해석은 교회 건물에 대한 재해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이제는 교회 건물에서 예배드리지 않는다고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기존 교회와 성도들은 교회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지 않고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가나안 성도’라 하여 이상한 시선으로 봐온 것이 사실이죠. 어떻게 신앙생활을 교회에 오지 않고 할 수 있냐고 말이죠. 일정 부분 타당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인해 그렇게 말했던 분들이 어쩔 수 없이 가나안 성도의 삶을 직접 경험해 보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는 함부로 가나안 성도들을 비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는 자신이 하고 있거나 연관된 것은 비판하지 않는 인간 본성 때문이겠죠. 이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예배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동안 교회는 “건물”에 치중한 것이 사실이죠.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려야 예배드린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니 예배드릴 공간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신학도 이에 따라 “건물 신학”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이런 현상을 복음과 교회 건물을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복음은 ‘가라’고 하지만 교회 건물은 ‘머물라’고 한다. 복음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라’ 말하지만 우리의 교회는 ‘잃어버린 자들이 교회를 찾게 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통찰은 코로나 19 이전이었으면 그저 교회 현실을 모르는 학자의 추상적 언어로만 취급되었을 것이며 그렇게 설득력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흩어져보니 이 구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해지네요. 그런데 가라면 어디로 가나요? 세상 아닌가요?

성전을 살리기 위해서 교회가 건물의 경계선을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다고 교회가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 밖으로 나가 자신이 가는 곳에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라고만 하지 말고 목회자들이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홍익대학교 건축과 유현준 교수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조명하면서 ‘건물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한 것에 일부 수긍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사무실에서 권력이 형성되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권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죠. 종교 권력도 비슷하다 합니다. 교회에 모여야 권력이 생긴다는 거죠. 예배 시간에 긴 의자에 앉혀서 (목회자가 있는) 한 방향을 바라보면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이 권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공간을 통해 권력을 창출한 쪽은 그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는 거에요. 그러니 권력을 쥐고 있는 쪽은 변화에 저항할 것’이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권력이 건물에서 나온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건물 즉 예배당만을 고집하면 결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장 그런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조금씩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회는 기존 성도들의 30%, 어떤 교회는 50%, 또 어떤 교회는 90% 정도가 예배당에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동 헌금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헌금이 줄면 목회자 사례비도 줄어들 것이고 선교비도 줄겠지요. 그러면 목회자가 어쩔 수 없이 이중직을 가져야 하거나 아니면 아내들이 직장을 다녀야 할 것입니다.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팬데믹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여러 번 올 수 있다 하는데 그렇다면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에는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정말로 교회 건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건물이나 공간을 가지지 못한 교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싶습니다. 코로나 19 기간 동안 교회가 이사 간다는 글을 종종 읽습니다. 이 코로나 기간에 예측되었던 일이지 싶습니다. 가슴이 아프네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자체 건물을 가지지 못한 교회들, 즉 새 들어 사는 교회는 렌트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우울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대안 중 하나는 예배당 공유 일 겁니다. 건물을 가진 교회가 건물 없는 교회에 오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곳 LA 기독교 방송국 중 하나인 CTS에서 개척교회 온라인 예배를 지원한다는 반갑고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체 건물이 없는 교회는 인력이 부족한 것이 당연하죠. 이 둘은 맞물려 있습니다. 예배당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사람이 없으니 그런 기술적 인력이 부족한 것은 당연하겠죠. 그러다 보니 코로나 19로 인해 미자립 교회가 예배 영상을 준비하는 데 상당한 기술적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방송국이 그런 어려움이 있는 교회에 장소를 제공해 주고 영상을 녹화해 주더군요. 이런 실제적 협력이 필요합니다.

한국기독공보 6월 11일 자 기사에 따르면, 한국 통합 측 서울북노회가 2020년 6월 9일에 열린 제74차 정기노회에서 ‘예배처소공유제(공유예배당제도)’를 총회에 헌의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예배처소공유제는 이미 미국에서는 시행되고 있는 “건물이 있는 교회와 예배당 사용 시간을 조정하거나 혹은 몇몇 작은 교회가 연합해 한 건물을 임대하고 예배당을 공유하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건의 사항이 올라온 것은 그만큼 요구하는 교회가 많기 때문일 겁니다. 코로나 19 이후 어려운 재정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제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지 싶습니다.

4. 교회 과제 2: 목회자의 변화(전 존재를 거는 신앙과 자기 비움)

목사는 설교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중요한 기독교적 자원이 된 설교가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이는 일부 목회자가 신학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신학을 왜곡하기도 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설교가 흔들리니 교회가 흔들리고 교회가 흔들리니 기독교 전체가 흔들거립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신자가 세상에서 신자로 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지 싶습니다. 이러한 때에 다시금 목회자의 거룩하고 중요한 사역인 설교를 회복하고 신학을 회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존 파이퍼는 『강해의 희열』 책을 마틴 로이드 존스에게 헌정하면서 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난치지 않은 마틴 로이드 존스에게.” 설교자에 대한 최고의 예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파이퍼 목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난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하려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치적 이슈를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자는 무엇보다 자신의 언어에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이죠.

어떤 목사님을 처음 만났는데 “감사합니다”는 말을 하더군요. 순간, ‘무엇을 내게 감사하지?’ 속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른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도 “감사합니다.” 하더군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언어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쓰는 이 언어는 뭘까요? 거룩한 언어인가요? 진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이 상대방의 가슴에 가 닿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학교 졸업 사은회 때 졸업생들이 사전에 각 교수에게 가장 좋아하는 말씀을 받아서 멋진 캘리그라피로 말씀을 담아 액자로 만들어 주더군요. 교수들이 탄성을 질렀습니다. 제가 나눈 말씀은 로마서 14:8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한마디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다음과 비슷한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이돌 노래 가사를 패러디하면서) 교인인 듯 교인 아닌 교인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라 부르고 누군가는 이들을 ‘종교인’이라 부릅니다. 교회인 듯 교회 아닌 교회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모임을 ‘거짓 공동체’라 부릅니다. 목사인 듯 목사 아닌 목사 같은 목사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삯꾼’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침 튀겨 가며 이야기하는 “복음의 본질”로 들어가야 하고 예수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개인이든 공동체든 그 어떤 형태로든 예수의 이름으로 장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질을 추구합시다. 그것 하며 살기에도 인생이 짧지 않은가요. 요즘 “복음이면 충분”하다, “예수면 충분”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말을 기독교 이외의 것들을 배제하자는 쪽으로 무게 중심을 기울여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본 의미는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살자는 말일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비록 앞날이 밝지 않을지라도, 상황과 조건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닌가요. 그런 삶의 고백을 우리 모두 하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단순히 교회 ‘다니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설교했다면, 이제는 삶의 자리에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참 신자의 삶을 사는 것이 바른 신앙임을 목회자가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체험적 설교를 강조하는 퓨리턴 리폼드 신학교 총장인 조엘 비키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했는지를 말씀드려야 하며 동시에 성도들의 영혼과 양심에 복음을 “생생하게” 전하려 하지 않았다면 “화’가 있을 것이라 직언합니다. 더욱이 리처드 백스터가 말하는 것처럼, 영적인 의사로서 설교자가 잘못된 처방전을 내릴 때, “영혼의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사든 성도든 자기를 지우려는 마음의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자기만 들어 있으면 하나님이 계실 공간이 없게 되죠. 하나님이 계시도록 하려면 자신을 채우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지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수도원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게 하는 예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바깥세상에 사는’ 누군가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편함 근처를 서성거린다면,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또는 생각을 해주기는 하려는지 안달복달 궁금해한다면, 어떤 의미로든 공동체에서 탁월한 존재가 되려는 마음을 은근히 품고 있다면, 손님들이 이름을 들먹이며 찾아주는 환상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원장이나 다른 수도사들이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길 기대한다면, 더 흥미로운 일과 자극적인 사건들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면.”

우리는 수도원에 살지는 않지만 일상에서 이런 마음들을 가지고 살지는 않는가요?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다면 우리는 그 만큼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산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 앞에 서는 목회자가 자신을 지우는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을 향해 두어야 사람들의 시선이 없더라도 허망하지 않겠지요. 그것이 자신을 지우는 것이겠지요.

5. 교회 과제 3: 교단을 넘어 일치로 나아가는 신앙

성도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매주 교회 가서 드리던 예배와는 다른 경험을 할 때도 있을 겁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교회나 다른 교단의 예배를 경험할 때도 있을 겁니다. 예배는 시작되었는데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의 온라인 시스템이 불안정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교회를 검색해서 예배를 드립니다.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예배드리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예배가 우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단을 제외한 경우, 그 교회가 어느 교단에 속한지도 모르거나 아니면 다른 교단인지 알아도 말씀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교단의 예배를 드리다 보니 그들의 예배와 자신이 속한 교회의 예배가 그렇게 다른 것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부르는 찬양도, 듣는 말씀 내용도, 예배 형식도 비슷한 것을 본다면 그런 질문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비슷한데 왜 이렇게 많은 교단이 있지?’ ‘무슨 차이가 있지?’ 그렇게 궁금한 것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몇 가지 교리적인 부분에서만 차이가 있는데 교단이 나뉜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교단 간에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음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450여 개의 교단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떨까요?

사실 교인들은 자신들이 어느 교단에 속한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교단을 선택해서 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장로교 가정에서 자란 이들은 대부분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또 그렇게 장로교 목회자가 되죠. 타 교단에 계신 분들도 거의 비슷할 겁니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교단이 정해지다 보니 다른 교단을 모를 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들의 좀 다른 신학을 때로는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정치적 이슈로 혹은 자그마한 교리 차이로 교단을 탈퇴하고 새로운 교단을 만드는 것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관행을 이제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속한 교회와 교단의 교리만을 진리라 여기는 기형적 신앙생활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분열의 죄과를 어떻게 감당할까요?

그런데 이제 성도들은 온라인 예배를 통해 다양한 예배를 경험하면서 교단들 사이에 별로 다를 것이 없음을 확인했으니 굳이 어느 특정 교단을 고집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배도 자신에게 맞는 예배를 찾아가겠죠. 이상하게 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긍정적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앞으로 성도들은 교단을 넘어서 신앙생활 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예배를 경험하다 보면 다양성 속에서 서로를 조금씩 인정하는 흐름이 형성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교회 일치와 연합 운동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분열된 교단이 코로나 19를 통해 일치를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역사적 아이러니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분명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이제 개교회들은 교단은 다를지라도 서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서로를 인정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만 살겠다는 이기심은 예수님이 주신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새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모습에 제자인 줄 알 것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요13:35) 서로 돕고 사랑하지 않으면 ‘제자’가 아닌 것이 되겠지요. 개교회가 속한 교단뿐만 아니라 타 교단과도 공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개교회를 넘어, 교단을 넘어 신앙생활 한다면, 이제 교회 일치 운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공개적인 담론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의 4가지 교회의 표식으로 고백하는 “나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를 정말로 진지하게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표식이 정말로 한국 교회에 적용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정말로 한국 교회는 분열이 아닌 하나를 지향하고 있는가, 정말로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를 삶으로 따르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고자 하는가, 정말로 개교회에 고립되지 않고 보편적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실제로 따랐던 사도들의 삶처럼 사도적 증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죠.

6. 교회 과제 4: 가정이 교회 되기

코로나 19 이후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원시공산사회’로 회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실은 가족 중심의 자급자족 사회 유형을 의미합니다. 물론 모든 것을 가족 안에서 마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거의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가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될 것입니다. 직장 일도 가정에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합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타주로 가던 아이들도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고 학교 기숙사도 오픈하지 않으니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가정에서 일하고, 공부하고, 놀기도 해야 하니, 그만큼 가정이 중요한 공간이 된 것이 사실이지요.

코로나 19가 오면서 예배도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드립니다. 그러나 만일 온라인 예배마저 힘들게 된다면 남는 건 가족 예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보통 자녀들의 신앙은 교회에 맡겼죠. 주일날 교회 보내고 주중에 성경 공부가 있으면 보내면서 자녀들의 신앙을 어떤 의미로 교회에 위탁해 온 것이죠. 그러나 지금 물론 출석하는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SNS를 통해 자녀들을 열심히 양육하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부분을 가정에서 부모들이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부모가 더욱더 말씀을 읽고 신앙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의 신앙을 부모가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말이죠.

2018년 1월 초부터 가정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아내와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순간 ‘양질 전환의 법칙’이 적용되면서, 제 잔소리가 첨가되더군요. ‘말씀의 잔소리화’ 내지는 ‘잔소리의 말씀화’ 말이죠. 그러니 예배가 지속이 안 된 것은 당연했겠죠. 그러다가 아이들과 함께, 매주 금요일, 토요일, 주일(때론 겨울 방학에는 매일) 온 가족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시작으로 해서 출애굽기, 창세기, 요한복음,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여호수아,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다니엘, 요나, 히브리서, 야고보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그리고 지금은 고린도전서를 읽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이후로 의도적으로 읽은 본문은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입니다. 교회도 가지 못하고 격리된 채로 있는 모습이 마치 바벨론 포로기를 살아가는 유다 민족의 이야기 같아서 말이죠.

가정 예배 방법은 본문 한 장을 같이 읽습니다. 아이들이 한국말이 서툴다 보니 영어로 돌아가며 읽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국말로 설명하며 중간중간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영어로 조금 합니다. 그리고 한 명씩 마음에 닿는 말씀을 나누지요. 아이들은 주로 영어로 하고 아내와 저는 주로 한국말로 하는데도 의사소통이 되지요. 이건 대부분의 이민 가정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현상일 겁니다. 한 가족 안에 언어로 인한 다양성이 형성됩니다. 이민 교회 안에 EM과 KM이 하나로 통합된 유형이죠. 또 부모 자녀 연합 예배가 이루어지니 세대 간 통합예배 유형이지요. 이 모델을 코로나 19 이후 한국 교회에 적용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가정 예배의 유익도 다양합니다. 가정 예배를 통해 무엇보다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아이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사는지 알게 되더군요. 공부 잘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밝고 건강하게만 자라기를 소망하지요. 언젠가는 아이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나누더군요. 학교에서 믿지 않은 친구 한 명이 처음으로 자기에게 와서 기도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에요. 아들이 그 친구한테 교회 가자 혹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아들이 크리스천 클럽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기도 부탁을 해 왔던 것이지요. 또 자살까지 시도했던 친구가 수련회에서 자신의 삶을 나누는 것을 아들이 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들이 웁니다. 아이들에게서 배웁니다.

말씀을 나누다 보면 신학 토론도 벌어집니다. 아이들의 질문이 날카로울 때가 있습니다. 신정론에 관한 질문, 신앙과 과학에 관한 질문, 신 존재에 대한 질문, 정치 사회에 관한 질문, 교회론에 대한 질문 등 다양합니다. 이런 질문을 아이들은 하는데 부모가 얼마만큼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그리고 교회학교도 아이들과 이런 토론을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질문에 부모나 교회가 제대로 답해주지 못하면 아이들은 고등학교 때까지 마지못해 교회에 가 주지만 대학 가서는 부모를 떠남과 동시에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아이들과 솔직한 신앙과 신학 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가정 분위기가 냉랭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서로 마주 앉고 싶지 않을 때가 있지요. 하지만 서로 정한 시간이니 그 시간이면 얼굴을 마주 보며 앉습니다. 그러다 보면 냉랭한 것도 풀리더군요.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있을 때 어떻게 극복하는지도 가정에서 먼저 배우게 되지 않을까요? 가정 예배, 여러모로 좋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지요.

가정이 없으면 이제 자기 자신이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예배가 없더라도, 온라인 예배를 드리지 못하더라도, 가정이 없더라도, 자신이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7. 교회 과제 5: ‘성육신적 선교’

앞에서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고 교회 건물에 갇히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선상에서 보자면 선교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교는 우리의 신앙의 언어를 함부로 믿지 않은 이들에게 강압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게리 채프먼의 유명한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을 잘 아실 겁니다. 부부 사이를 진단하는 상담 책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말로 달콤한 말로 고백해도 상대방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제1 언어로 말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제1 언어를 배워 그 언어로 사랑을 고백해야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기독교 변증학의 핵심적인 방법적 도구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를 세상에 그대로 이식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사용해서 그들과 공공의 자리에서 이야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인간이기에 공통의 언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공통 언어를 사용해 그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의 공통의 언어로 기독교의 언어를 번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와 시도를 하지 않고 여전히 교회 언어를 그들에게 주입하고자 한다면 기독교는 점점 더 세상에 설 자리가 없을 겁니다.

어느 신학자는,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으로 “번역”되었다고 하더군요. 공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번역되지 인간이 하나님으로 번역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사랑하셨기에 하나님 자신을 인간으로 번역시킨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 합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사랑한다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신앙의 언어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번역을 ‘변질이다’, ‘타락이다’, ‘혼합이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세상과 담쌓고 살아가는 순수만 고집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순수인가요?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증거 할 때 선교하는 주체의 마음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을 강권하여 주의 집을 채우려는 목적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그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그 마음이 필요하지 싶습니다. 말씀만을 전한다고 듣는 것이 아니지요. 수많은 방송 매체로 전한다고 믿지 않은 이가 듣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핑계를 무마시키기 위해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복음을 듣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의 본래적 의미일 겁니다. 믿지 않는 이들을 찾아가 복음이 들리도록 전파하지 않는데 그들이 어찌 듣겠습니까? 복음이 들리지 않는데 어찌 믿겠습니까? 이제는 전도나 선교가 믿지 않은 이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선포하는 자기 만족적 선교로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믿지 않은 이들과 친구라도 되어 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어떤 언어를 쓰는지, 교회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그러한 기회와 장이 코로나 19를 통해 예기치 않게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기회입니다. 어떤 채널을 통해서도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세상과 만나 소통해야 합니다. 유튜브나 카톡이나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과 접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어 자막을 넣으면 전 세계와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이 흐려졌으니 이제는 세계가 우리 개교회의 교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선교의 범위가 확연히 넓어졌고 그 방식이 직접적일 수 있으니 매우 긍정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프로스트와 허쉬는 교인들이 교회 들어갈 때 “이 곳은 하나님의 집이니 경외감과 정숙함으로 들어갈지니라”라는 문구를 본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문구 자체를 비판할 것은 없지만 이 문구가 하나님이 “오직 여기에만” 계신다는 메시지를 준다고 합니다. 다르게 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교회에 붙여진 그 문구는 맞는 말이기에 그대로 두고, 교인들이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갈 때, 이런 문구를 제시하면 어떨까요? “세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이며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곳이니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낼지니라.” 교회의 인 앤 아웃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예배드리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해서 살아가는 신앙의 간극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또한 선교이겠지요.

선교해서 교회로 데려오기도 해야겠지만 이제까지 그렇게 해서 많이 오지 않고 있다면 이제는 방법과 방향을 좀 바꾸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을 그들의 문화에서 “끄집어내는”(extrational) 혹은 교회로 “끌어모으는”(attractional) 크리스텐덤 시기의 교회 전도로는 21세기에 특히나 코로나 19 이후에는 효력이 약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끌어모아도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선교적 교회의 성육신적 방법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프로스트는 “만약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수많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다가갈 수도 없고 참여할 생각도 없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 제한해 버린다면 그것은 복음을 확실하게 방해하는 것”이라 합니다. 핵심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오라고만 하지 말고 교회가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구체적 방법은 신학자와 목회자가 머리를 맞대고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8. 교회의 과제 6: 교회 다시 회복하기

산책하는 동네에 이런 팻말이 있습니다. “DRIVE LIKE YOUR KIDS lIVE HERE.” “당신의 아이들이 여기 산다고 생각하고 운전하십시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의 핵심은 ‘조심히 운전하세요’일 겁니다. 그러나 때로는 부차적이거나 숨겨진 이면의 표현이 더 깊은 메시지를 줄 때가 있죠. 이 팻말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당신의 자녀가 산다는 생각으로 조심히 운전하세요라는 의미를 전해 주는 듯합니다.

이 말을 교회에 가지 못하거나 가는 것이 제한적인 코로나 19 상황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삶에서 신앙생활 하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여러분이 가는 곳 어디서든지 참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 모두가 알지요. 수시로 넘어집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 자신의 신앙을 잡아 줄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본질상 공동체를 지향하는 관계적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약한 인간인지라 공동체와 떨어져 있으면 쉽게 무너지고 게을러지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합니다. 당장 온라인으로 예배드릴 때 주일날 교회 가듯 준비하지 않은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느 트로트 노래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목사도, 성도도 꽃이랍니다~ 혼자 두지 말아요~’ 혼자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속에서 함께 신앙 생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싶습니다.

우리는 암몬 사람 도비야가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벽을 재건할 때 말했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느4:3) 라는 조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한국 교회를 이렇게 두면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모일 날이 있겠지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이들의 마음가짐이 달랐던 것처럼, 코로나 19로 인해 흩어졌다 모인 교인들은 분명 이전 모습과 다를 것입니다. 마음가짐도,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말이죠. ‘교회가 정말로 소중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세상도 무시하고 외면할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이기에 잘 가꾸어 가야 할 공간임을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교회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여우가 아닌 코끼리가 올라가서 흔들어도 든든히 설 수 있도록 교회를 회복해야 합니다. 조롱에 맞서는 방법은 조롱이 아닙니다. 그 조롱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든든히 서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교회가 세상과 막역한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무슨 목소리라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목소리를 세상이 듣지 않으려 한다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자세를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들으려 하겠지요.

최근에 미국 경찰들이 한쪽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저는 어떤 설명 없이 사진으로만 그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어떤 거룩한 의식을 치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자세는 용서를 구하는 측면과 시민들과 함께하겠다는 연대의 의미를 지니는 몸짓이라 하더군요. 무릎 꿇는 문화가 없는 그들에게 그 정도 자세만으로 상당히 낮아진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이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무릎 꿇는 문화를 배워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두 무릎을 꿇어야죠. 상징은 의미를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한쪽 무릎 꿇으며 여전히 폼나게 자신을 포장하는 용서 구함이 아니라 두 무릎을 꿇어 시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에 보여야 하는 자세는 진정으로 무릎 꿇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물론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이 무릎 꿇는 이벤트를 하긴 합니다만 진정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요? 세상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했음을 시인하는 차원에서 무릎 꿇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개혁교회 전통 안에 ‘행하지 않은 죄’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렇게 말합니다. “행하지 않음으로써 짓는 죄 또는 태만의 죄 역시 행함으로써 짓는 죄만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그리스도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태만의 죄 때문에 정죄 받아 영원한 불로 들어가도록 저주를 받는다”고 말입니다. 에드워즈는 도둑, 포악자, 사기꾼, 술주정뱅이, 중상하는 자,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헌신적이고, 겸손하고, 화평하고, 사랑이 많으며,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법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이 본문은 민중 신학, 해방 신학, 흑인 신학만이 인용하는 본문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기에 그 어떤 신학이라도 수용해야 하는 본문일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말을 지금 상황으로 풀면 우리가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와 약자와 창조질서(생태)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만나기 위해 이 일부터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행한 태만의 죄가 있음을 고백하며 세상으로 나간다면 세상이 그래도 교회의 목소리를 좀 듣지 않겠습니까.

III. 뉴 노멀 시대 뉴 크리스천 되기

요즘 많이들 “뉴 노멀”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새로운 현상’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면보다는 비대면으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올드 노멀”이 진짜 노멀이고 “뉴 노멀”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뉴 노멀’이 지속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뉴 노멀 시대에 우리 기독교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선교학자인 레슬리 뉴비긴의 말처럼 ‘복음은 변함이 없습니다만 세상은 변하고 있으니’ 그 복음을 전하는 방식도 변해야 할 것입니다. 바뀐 상황에 복음의 형식이 발맞추어 가야 하는데 복음이 바뀌면 안 되죠. 그런데 그동안 교회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반대로 성도들의 형편에 따라 복음을 변질시키지 않았나요? 그들의 삶이 부하여 기쁨과 평안의 설교만을 원하면 십자가와 진정한 복음 이야기보다는 복과 더불어 긍정적 삶의 태도를 더 강조했었지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철저한 복음의 왜곡일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뉴 노멀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야 할 교회와 우리는 “뉴 처치”와 “뉴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이상 우리는 늘 언제나 옛날만 그리워하는 “꼰대 교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때만 이야기하는 “라떼 크리스천”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뉴new”는 변하는 시대에 카멜레온처럼 약삭빠르게 대처하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 어떤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복음대로 살고자 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아니겠습니까?

코로나 19 이후 이제 교회든 성도든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인지, 진짜인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답해야 합니다. 그동안 예배당 출석으로 성도인지 아닌지가 구분되었다면 이제는 정말로 자신의 삶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그분의 말씀 따라 사는 자가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새로운’ 그리스도인일 겁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권면합니다. 우리 스스로 정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 안에 있는지 질문하고, 만일 우리 자신이 정말로 그러하다면, 그것을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믿음 대로 사는지를 스스로 확증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믿으며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진짜 “남은 자”들이 있는 한 기독교와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유수된 사람들이 희망을 먹고 산다는 것을 안다.”(아이스킬로스) 코로나 19라는 전 지구적 억압적(?) 상황에 유수 된 자들로 살아가면서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다시금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교회의 십자가 불을 밝히고, 교회 문을 열고, 서로를 맞을 준비를 하는 그런 희망을 갖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더불어 세상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아야 하는데, 바울의 고백을 엮어 보면,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그러나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고전3:7).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지요.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하나님의 동역자들”(고전3:9)이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동역자이죠. 우리도 ‘아무것도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이니 교회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동역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때 소금과 빛이 되라 말씀하십니다(마5:13, 14). 빛과 소금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이며 실천적 상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빛을 비추며 어떻게 짠맛을 낼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오라 해서 주보 나눠주듯이 빛과 소금을 조금씩 나눠주면 될까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 나가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더 세상을 밝게 할까요? 교회에 오는 숫자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빛과 소금인 우리가, 교회가, 세상에 나가면 교회에 오는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면 훨씬 더 세상은 밝아지고 훨씬 더 세상은 싱싱해질 것입니다. 이 상상이 현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인 기형도는 「나리 나리 개나리」라는 시에서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했습니다.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살아 있기를 소망합니다. 코로나 19라는 겨울을 살아내어 다시 오는 봄에 꽃 피어 서로 안부를 물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꽃 이야기하니 갑자기 궁금하네요. ‘꽃은 왜 자신의 줄기 혹은 가지 끝에 필까요?’ 조금은 안정적인 중간에 꽃 피지 않고 가장 많이 흔들리는 끝에 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꽃이 그렇게 말하는듯합니다. ‘바람아 아무리 불고 흔들어 봐라. 나는 네가 가장 많이 흔드는 곳에서 내 꽃 피운다.’ 가장 많이 흔들리는 지점에 꽃이 피는 것은 꽃의 담대함이자 역설적으로 꽃의 아름다움일 겁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세상도 교회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교회는 중심을 잡아야지요. 꽃처럼 담대해야지요. 그리고 아무리 흔들려도 꽃 피워야지요. 이 기간이 지나면 교회도 다시금 꽃 필 날이 올 것입니다. 허술한 신앙이 이단이 활동하는 계기가 되게 할 수 있으니, 하나님 말씀에 굳건히 서서 단단하게 무장하고, 예수 십자가 바라보며,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그런 그리스도인, 그런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박동식(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