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g

▲ 장덕영 수필가(미주장신 신대원, 에세이 에디터)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조지훈 < 사모 > 

 

혈기 왕성하던 시절, 술에 취해 헤어진 여인을 그리워할 적마다 즐거이 써먹던 글귀다. 참 많이도 애용한 구절이다.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너무 늦었거나 적어도 내 주변을 떠났음이 분명하다. 해야지 해야지 하다 시기를 놓쳐 마음속 여인마저 떠나버린 애걸복걸 스토리를 아직 기억하는가. 그런 일을 몇 차례 겪고 여자와의 헤어짐에 무덤덤해질 즈음 담담한 마음으로 결혼에 임했을 테다. 그리스도 밖에, 그것도 멀리, 아주 멀리 있을 때 일이다. 

 

조지훈은 이 모두를 미리 알고 정하신 존재가 하나님임을 어찌 알았을까.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을 나비로 그려내는 그가, 무속과 불교의 종교 의식을 작품에 쏟아내는 그가 엉겁결에 부처님 대신 하나님을 찾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 대목에서 Calvin을 써가며 ‘종교의 씨앗’이 그에게도 분명 심어져 있다고 말하기엔 좀 그렇다. 그가 취중에 떠난 여인을 그리다 막잔만큼은 하나님을 위해 건배한 것만 확실하다. 여인과 헤어져 세속의 옷을 벗어던지고 종교에 귀의하는 일이 한 포기 연꽃 같은 남성에겐 있을 법도 하나, 솔직히 술잔이나 기울이다 더럭 하나님을 위하여라 함은 뜬금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여자에게 상처받을 때 찾는 그저 그런 위로의 대상인지, 다시는 여자를 그리워하지 않게끔 의지할 수 있는 영혼의 절대자인지 그에게 묻고 싶다. 하기사 문학에선 장르를 넘나들기도 하고 반전을 도모하기도 하여 독자를 당황케 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극적 ‘사모’를 위해 종교를 넘어 우리 모두의 주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간주하고 넘어간다.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빌립보 가이사랴의 여러 마을로 가던 중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5, 눅9:20)는 돌발질문을 하신다. 바요나 시몬이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겁도 없이 용감무쌍하게 대답한다. 예수께서 그에게 표창하시길 복을 주고 반석이란 의미의 베드로 이름도 지어주며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노라 하신다. 베드로가 여럿 제자 중에서 특별한 증인으로 나아가는  준비 과정에는 그리스도 주님과 함께하는 개인적 경험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그가 그리스도께 질문을 들고 다가가기도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가오실 때도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개인적 경험은 고사하고 나는 그리스도께 드릴 질문이나 하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 일이 있고 엿새 후, 예수께서 제자들 훈련 좀 시켜야겠다 생각하셨는지 베드로는 물론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마17:1).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예수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장면을 제자들이 목격한다. 모세와 엘리야는 애굽과 아합에게서 노예와 폭정으로부터 백성을 건져내고, 시내산과 갈멜산에서 율법과 위용으로 이스라엘을 드러낸 자다. 아직 구약의 틀을 깨지 못한 제자 셋을 간택하여 뭔가를 보여주려 하는데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요20:29)는 말씀을 하기 전이요 유튜브가 이 세상에 나오기 2000년 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최 우리 인간들은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일 낫다고 하는 제자 셋마저 확고히 할 수 없었을 터라 예수께서 그리 했나 싶다. 어쨌거나 이때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길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여기에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라 밝힌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어디 하나 속세의 떠난 여인을 위하여라든가 초라해진 자신을 위한다는 취지는 없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대로 예수께서 변형하시어 자신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제자 셋에게 목격하게 하신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한 이 사건을 접할 때마다 나는 언제 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할지 그 생각뿐이다. 예수께서는 기도 중에 용모가 변화한다 (눅9:29). 신학 공부 중인 나는 어떤가. 교회를 섬긴다며 그냥 다니기만 하는 나는 어떤가. 마음가짐 태도 정신의 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도나 제대로 하는가. 고난이 다가오면 여기저기 물어보고 위기나 겨우 모면할 뿐, 기도를 통해 간구한 적 있는가. 이곳저곳 구걸하여 목숨을 간신 유지할 뿐, 기도를 통해 극복한 적 있는가. 이도저도 아닐 때 술을 이용, 그 순간들을 모면하려 들지 않던가. 양심은 있어 마지막 잔은 하나님을 위하여라 속으로 외쳤을 테다. 그리스도의 변화를 목격한 제자 베드로처럼 나도 언젠가는 진정한 초막 셋을 지어야만 하리라.

 

슬쩍 장난 ‘끼’가 발동한다. 술 대신 글은 어떤가. 내 글을 모아 책을 엮고 이렇게 읊으리라.

 

한 권은 내게 오신 성령을 위하여

또 한 권은 주님과의 영원한 약속을 위하여

그리고 한 권은 내 사모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지막 한 권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마지막 고백은 동탁과 같다.

 

• 동탁 : 조지훈의 본명

[기사출처: 크리스천 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