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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덕영 수필가

20여 년 전 미국으로 이민 올 때 나는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현실의 문제고 다른 방도가 없던 이유다. 삶, 그 한 글자로 모든 걸 답할 수 있을 테다. 캘리포니아에 뿌리 내리고 열매 거두는 이즈음 고국 떠난 이야기는 왜 나오는가. 큰 바다 너머 이주, 닥쳐올 고난의 삶까지 예상하고 견디어 낸 지 오래다. 외려 지금은 귀환이란 단어가 간혹 생각나고 잔잔히 떠오르며 또다시금 갈등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주, 고난 그리고 귀환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나는 고뇌한다.

 

디아스포라. 내가 그 삶 속에 있음을 알고부터 이민에 대한 현실적 사고는 뼈아픈 유대 역사를 넘어 세상으로  흩어져 나간 민족들 이야기와 결부되면서 성경적 역사적 그리고 인간적 고난의 사색으로 발전한다. 가죽옷 하나 걸치고 에덴 동쪽으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삶이 고난을 암시하는 이주의 시작이라 한다면 먹고살기 위해 땀 흘리는(창3:19) 인간의 역사는 디아스포라가 전부라 해도 무리가 아니겠다. 이후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는 부르심이 있고 유대 민족의 삶은 오늘까지 더 철저한 이주 역사를 이어내려 온다. 

 

우리 한민족에게도 고난의 그것이 있지 않은가. 두만강 ‘건너’ 연해주로 이주하여 새 터전을 가꾸고 일구어 정착할 무렵, 세상 헤게모니가 바뀌어 수억만리 떨어진 중앙아시아 어디메쯤의 발음조차 생소한 무슨탄 뭐뭐탄(1)이란 곳으로 강제 이송된 우리 선조들의 고난이 앗수르로 끌려간 사마리아인들과 무엇이 다르며 바벨론 유수의 유대인들과 어떻게 다르겠는가.

 

세상으로 흩어져 나간 인간의 삶은 궁극에 가선 하나님의 역사를 지향하는 일이리라. 창조 후 피조물 인간은 에덴에 머문 시간보다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내고 또다시 흩어져 번성한 시간이 태반임을 산정해 볼 때 진정 기독교 복음의 역사는 디아스포라 위에 있을 테다. 추방과 박해로 시작한 저 디아스포라는 모든 민족이 다른 국가로 스스로 이동하여 자기들 고유 문화를 계승하며 살아가는 세계화가 이제는 보편적이다. 디아스포라의 세계화는 오늘날 세계의 정확한 패턴이다. 에덴을 나오고 갈데아 우르를 떠나와 강 저편으로 ‘건너간’, 고난의 삶을 이겨내고 이어가는 신학적 이유를 찾아야 하리라.

 

스데반 제거 후, 사울이 여세를 몰아 체포영장 들고 다메섹으로 말을 달릴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춘다 (행9:3). 예수라는 이름을 듣고 사흘간 시력을 잃자 주께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비늘을 벗겨내고 세상을 다시 보게끔 하며 성령으로 그를 충만케 하신다 (행9:5-18). 사울이 세례를 받고 다메섹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한다. 이로써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위한 사도 바울의 전도가 시작되는 바, 복음의 확산은 성령의 주도하심하에 박해로 그리스도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져 가는 디아스포라에 근원을 둔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행9:31)

 

뜻하지 않은 박해와 고난으로 인간들이 땅끝까지 떠나고 흩어지나 궁극은 복음 전파를 위한 거룩한 밑거름일 뿐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그 밑에 깔려 있음을 인간이 알아채기도 전, 복음의 뿌리는 디아스포라 토양 밑으로 뻗어나간다.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이방에 정착한 유대인 및 그 지역을 말하며 성경적으로는 하늘 나라를 본향으로 하여 지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약1:1, 벧전1:1). 앗수르나 바벨론에 의해 메소포타미아로 강제 이주된 경우도 있으나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점령 이후에는 능동적으로 흩어져 나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훨씬 전부터 이미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그리스 이탈리아에 유대 공동체를 형성 정착해 나간다. 

 

이들은 흩어져 살아도 유대 민족성을 유지하며 성전세를 납부하는 등 팔레스타인과의 일체성을 잃지 않는다. 회당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어느 정도 자치적 권한을 행사하며 이방 사람들과 삶을 교류하나 아무래도 디아스포라에 대한 주변 민족들의 시선은 지금이나 예나 동과 서를 막론하고 곱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유대인들만의 사회성 즉 그들이 믿는 종교가 유일신적이고 배타적이며 특이하고 복잡한 관습 및 동족 중심의 성향에서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디아스포라 문화는 팔레스타인과 다르게 진화한다. 헬라 문화에 둘러싸여 살아가기에 헬레니즘에 대해 팔레스타인 유대인들보다 적대적이지 않으며 예루살렘에서 멀리 있어도 회당 synagogue을 지어 안식일을 지켜나간다. 이 회당들이 후일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큰 디딤돌이 되어준다. 

 

달마 대사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모르겠으나 성서적으로 볼 때 동으로 떠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의 삶, 하나님을 등지는 삶을 살아간 경우가 많다. 에덴에서 나와 동쪽으로 간 역사가 그렇고, 이스마엘이 동쪽 아라비아로 이동한 기록이 그러며, 롯이 두 딸을 데리고 요단 동쪽 소알 산지로 이주한 사실이 예외 없이 그러하다. 고난의 굴레에서 벗어남이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한 탓이다. 캘리포니아로의 이주는 내 이동 방향을 말해주기에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삶이 고단하고 믿음이 흐려져 매양 회개하고 구원을 갈구한다. 우연히 동쪽으로 이동한 탓일까.

 

에덴 동쪽으로 추방, 그리스도인 박해, 흩어지는 생명들, 땅끝까지 퍼져나간 기독교 복음, 그리고 디아스포라 고난의 삶은 끊임없이 파도를 일으키며 내게 다가와 하이얀 포말을 일으키며 흩어진다.

 

 

(1) 무슨탄 뭐뭐탄 : 1937년, 스탈린 정책 의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17만 고려인 강제 이주

 

[기사출처: 크리스천투데이]